청송뉴스
청송, 산이 품고 역사가 빚은 천년의 고을
김태선 기자 · 2026-10-04
- 고대의 작은 고을에서 청송도호부를 거쳐 오늘의 청송군으로
- 산과 물이 빚은 삶의 터전… 의병과 유교문화, 농업을 지나 ‘산림관광도시’로 새로운 길
靑松의 역사는 산에서 시작됐다.
태백산맥의 산줄기가 굽이굽이 이어지고 용전천과 길안천이 계곡을 따라 흐르는 청송. 오늘날에는 주왕산과 주산지, 청송사과와 고추로 전국에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그 이름과 행정구역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오랜 세월의 변화와 굴곡이 있었다.
고대의 여러 고을에서 시작해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행정구역이 끊임없이 재편됐고, 조선시대에는 청송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지역의 위상이 높아졌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는 의병과 항일운동의 현장이 됐으며, 근현대에는 농업을 기반으로 지역경제를 일구면서 관광과 생태·지질 분야로 변화해 왔다.
청송의 역사는 곧 산과 사람의 역사다.
▲ 선사시대부터 이어진 삶의 터전… ‘산’이 만든 청송의 역사
청송은 넓은 평야보다 산과 계곡이 많은 내륙 산악지역이다.
용전천과 길안천을 비롯한 하천은 계곡 사이에 생활공간을 만들어냈고, 물과 농경지가 확보되는 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일궜다.
선사시대부터 청송의 사람들은 하천 주변의 작은 평지와 계곡을 따라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은 때로는 삶을 제한하는 장벽이었지만, 외부 세력의 접근을 막아주는 자연 방어선이기도 했다. 이 같은 지리적 특성은 청송 곳곳에 독자적인 생활권과 마을공동체가 형성되는 배경이 됐다.
오늘날 청송의 지역 정체성을 설명할 때 ‘산’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삼국시대, 여러 고을로 존재했던 청송
청송의 역사는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문헌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날 청송읍 일대는 청기현, 안덕면 일대는 이화혜현, 진보면 일대는 칠파화현 등으로 불렸다.
당시 이 지역은 고구려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으나 신라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신라 영역으로 편입됐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 경덕왕 때에는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졌다. 청기현은 적선현으로, 이화혜현은 연무현으로, 칠파화현은 진보현으로 각각 이름이 바뀌었다.
오늘날 청송·안덕·진보로 이어지는 지역적 뿌리가 이 시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셈이다.
▲ 후삼국시대, 고려와 후백제의 세력이 맞선 전략적 공간
신라의 쇠퇴와 함께 후삼국시대가 시작되면서 청송 역시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에 들어갔다.
청송과 진보 일대에서는 지방 호족세력이 성장했고, 고려와 후백제의 세력이 맞서는 접경지역으로서 전략적 중요성도 커졌다.
특히 진보 지역은 당시 중요한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진보성의 장군 홍술과 재암성의 장군 선필 등이 고려에 귀부한 기록은 이 지역이 단순한 산간지역을 넘어 동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전략적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 고려시대, 청부·안덕·진보·송생으로 이어진 행정구역
고려시대에는 청송 지역의 행정체제가 여러 차례 개편됐다.
오늘날 청송읍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청부현으로 불렸고, 안덕 지역에는 안덕현이 자리했다. 진보 지역 역시 진보현과 진안현 등을 중심으로 행정구역이 변화했다.
이 가운데 청송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명이 ‘송생’이다.
송생은 현재 청송읍 일대의 옛 지명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독립적인 행정단위로 발전했으며, 조선 초기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청송이라는 지명이 정착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됐다.
▲ 조선시대, ‘청송’이라는 이름이 역사의 전면에 서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청송 지역의 행정구역은 여러 차례 재편됐다.
1418년에는 청부현과 진보현을 합쳐 청보군이 설치되고 이후 세종 때 행정구역을 다시 정비하면서 옛 청부현과 송생현을 합쳐 청송군이 설치됐다.
이때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청송’이라는 이름이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고 청송의 지역적 위상은 다시 한 단계 높아진다.
1459년 세조 5년, 청송에 청송도호부가 설치됐다.
도호부는 일반 군현보다 높은 행정적 위상을 가진 지역으로 청송이 도호부로 승격했다는 것은 당시 이 지역이 행정·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 산촌사회 속에서 꽃핀 유교문화
청송의 산악지형은 지역의 경제와 생활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농경지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가운데 주민들은 농업뿐 아니라 산림자원과 각종 토산물을 활용하며 삶을 이어갔다.
한편으로는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가 지역사회 깊숙이 자리 잡았다.
청송향교를 비롯해 찬경루와 보광전 등은 청송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청송 심씨를 비롯한 여러 성씨들이 지역사회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문중을 중심으로 한 향촌사회가 형성됐고, 향교와 서원 등을 중심으로 학문과 유교적 생활문화가 발전했다.
산촌이라는 지리적 조건 속에서 독특한 지역공동체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 임진왜란, 산악지형을 따라 이어진 의병의 역사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청송에서도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청송의 깊은 산과 계곡은 외부 세력의 진입을 어렵게 하는 동시에 평상시에는 주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터전이었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항전의 공간으로 그 역할이 달라졌다.
이와 같이 산악지역이 의병 활동에 유리한 공간으로 작용했고 또한 청송사람들이 타 지역사람들 보다 의협심이 강하고 용감하여 조선 말기 항일 의병운동으로 이어지는 지역적 역사와도 맥을 같이한다.
훗날 대한민국에서 하나뿐인 '의병기념관'이 청송에 자리한것도 이러한 것에 영향력을 받았다.
▲ 1895년 청송군 출범… 근대 행정체제로 전환
19세기 말 조선의 행정체제가 크게 변화하면서 청송 역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지방행정체제가 개편되면서 청송도호부는 청송군으로 바뀌었다. 진보 지역도 진보군으로 개편됐으며, 1896년 13도제가 시행되면서 청송은 경상북도에 속하게 됐다.
이어 1914년 일제의 부,군,면 통폐합 과정에서 진보군이 폐지되고 일부 관할지역이 청송군에 편입됐다.
현재 청송군 행정구역의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지는 중요한 시기였다.
▲ 일제강점기, 청송에서도 울려 퍼진 독립의 함성
청송의 근현대사는 항일운동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청송 지역 인사들도 산남의진을 비롯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청송에서도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운동이 벌어졌는데 3월 26일부터 이틀동안 청송의 만세운동에는 수백 명의 주민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청송의 산과 계곡은 이처럼 지역 주민들의 생활공간을 넘어 지리적 특성으로 인한 항전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 농업에서 관광으로… 새로운 청송의 시대
광복 이후 청송은 농업을 중심으로 지역경제의 기반을 다졌다.
1979년 청송면이 청송읍으로 승격하면서 행정중심지의 위상을 갖췄고, 1993년에는 군청 소재지가 현재의 청송읍 월막리로 이전했다.
1990년대 이후 청송은 농업 중심의 지역경제에 관광산업이 더해지면서 주왕산과 주산지 등 천혜의 자연환경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주목받았다.
청송사과와 고추 등 농특산물 역시 청송의 대표적인 지역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 ‘슬로시티’에서 지질공원까지… 자연이 경쟁력이 되다
2011년 청송은 국제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자연과 전통적인 생활문화의 가치가 다시 조명됐다.
이어 지질공원 지정 등을 통해 청송의 지질·생태·경관적 가치가 관광자원으로 부각됐다.
청송의 관광은 단순히 유명 관광지를 찾아가는 방식에서 벗어나 자연환경과 역사, 문화, 지역 농산물을 함께 경험하는 체류형 관광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2019년에는 부동면의 명칭이 주왕산면으로 변경되면서 청송을 대표하는 자연유산인 주왕산의 상징성이 행정구역 명칭에도 반영됐다.
▲ 천년의 역사 위에 세워진 ‘오늘의 청송’
현재 청송군은 청송읍과 7개 면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행정구역만으로 청송의 역사를 설명하기에는 그 시간의 깊이가 너무 깊다.
선사시대 하천과 계곡을 따라 시작된 삶은 삼국시대의 여러 고을로 이어졌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청부·송생·안덕·진보 등 여러 행정구역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청송’이라는 이름을 얻어 청송도호부로 승격했고, 근대 이후 청송군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쟁과 의병, 항일운동의 역사를 지나 농업을 기반으로 지역사회를 일궜으며, 이제는 자연과 역사, 문화가 결합된 관광도시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산은 그대로였고, 사람은 역사를 만들었다
청송의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산’이다.
산은 청송 사람들의 삶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삶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됐다. 산에서 농산물을 얻었고, 계곡에서 물을 얻었으며, 위기의 순간에는 산을 의지해 나라를 지켰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그 산이 청송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됐다.
주왕산의 기암괴석과 깊은 계곡, 주산지의 고요한 풍경, 청송의 산림과 지질자원은 과거에는 생활의 터전이었지만 이제는 지역의 미래를 이끌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청송은 과거와 현재가 단절된 도시가 아니다.
고대의 고을에서 조선의 도호부로, 근대의 군으로, 그리고 자연과 문화가 공존하는 관광도시로 이어지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청송은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왔다.
푸른 소나무를 뜻하는 ‘청송(靑松)’이라는 이름처럼, 청송의 역사도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키면서 시대에 따라 새로운 가지를 뻗어왔다.
산이 품은 역사, 사람이 이어온 삶.그것이 오늘의 청송을 만든 가장 오래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