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뉴스
청송의 자부심, 청송도호부의 역사를 말하다!
김태선 기자 · 2026-10-29
청송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되살려야 할 역사가 있다.
조선시대 청송의 행정과 정치, 지역사회의 중심이었던 청송도호부가 바로 그것이다. 1459년 부터 1895년 지방 행정제도가 개편될 때까지 이어진 청송도호부의 역사는 단순히 한 지방 관청의 역사를 넘어 청송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행정 중심지로 자리 잡았으며, 그곳에서 어떤 인물과 문화가 형성됐는지를 보여주는 지역사의 중요한 줄기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옛 관아의 모습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남아 있는 문헌을 찾아 기록을 읽고, 흩어진 역사적 사실을 하나씩 맞춰 가야만 청송도호부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청송도호부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연재를 시작한다. 그 첫걸음은 2004년 민준기 씨(68,청송읍)가 수년간 옛 문헌을 조사하고 고증해 발간한 《세종대왕비 소헌왕후의 고향, 청송도호부문헌고찰》에서 출발한다.
이 책에는 청송도호부의 연혁을 비롯해 관아 건물의 명칭과 규모, 배치에 관한 고찰이 담겨 있다. 관련 문헌의 해석과 역대 수령의 임관 기록, 도호부사와 군수의 행적, 청송과 관련된 인물에 대한 논의도 살펴볼 수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는 복원하기 어려운 옛 청송의 모습을 문헌을 통해 추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앞으로 이어질 연재에서는 이 책에 수록된 기록과 관련 사료를 바탕으로 청송도호부의 설치와 변천, 관아의 모습, 역대 수령과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앞서 청송도호부가 지닌 역사적·문화사적 특징을 먼저 짚어본다.
- 거듭된 행정적 변화를 거쳐 도호부로 승격된 청송
청송도호부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먼저 청송의 행정적 변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송은 처음부터 독립된 행정 중심지였던 것은 아니다. 청부현이 영덕 지역의 속현으로 존재하던 시기를 거쳐 진보현과의 통합, 청보군 설치, 청송군으로의 개편 등을 겪었으며, 이후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지역의 행정적 위상이 높아졌다.
《청송도호부문헌고찰》은 이러한 변천 과정과 함께 청송이 도호부로 승격된 배경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다. 특히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고향이라는 역사적 배경은 청송의 위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로 다뤄진다.
다만 청송의 행정구역 변천은 각 시기의 관제와 지명, 통합·분리 과정을 구분해 살펴야 한다. 청부현에서 진보현, 청보군, 청송군을 거쳐 청송도호부에 이르는 과정은 관련 실록과 지리지 등의 기록을 대조해 보다 정확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 소헌왕후의 고향, 청송이 간직한 역사적 자산
청송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소헌왕후 심씨다.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는 청송 심씨 가문 출신으로, 청송이 왕실과 연결되는 역사적 배경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소헌왕후의 생애는 조선 왕실의 역사뿐 아니라 청송의 인물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부친 심온이 태종대에 사사되면서 왕후의 지위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었지만, 소헌왕후는 높은 곤덕(왕후가 갖추어야 할 유순하고 덕스러운 성품)과 내조로 일축되고 세종대왕이 선정을 펼칠수 있도록 기여한 공이 지대하여 성군(聖君)에 필적하는 하늘이 내린 성모(聖母)라 하여 폐비를 면할수 있었으며 이후 세종의 재위 기간 동안 왕비로서 왕실을 이끌었다.
청송에서는 소헌왕후와 관련된 전승과 유적을 통해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보광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는 표현이나 왕후의 덕이 세종의 선정에 기여했다는 평가는 전승과 후대의 평가를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 관아 중창 기록이 전하는 옛 청송의 모습
청송도호부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 가운데 18세기 청송 관아의 중창과 관련된 기록문헌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당시 청송도호부사 송징태가 1738년부터 1740년까지 관아를 중창했다는 내용이 후대의 《청송부읍지》를 통해 전해진다. 해당 기록은 부사 최광태와 관련된 문헌 자료로도 소개돼 있다.
관아의 중창 기록은 단순히 건물을 수리했다는 사실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당시 관아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각 건물은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 관아가 어떤 구조로 배치됐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러한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는 점은 청송도호부의 역사 연구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만 기문의 원문과 전승 경위, 《청송부읍지》의 수록 내용을 대조해 구체적인 건물명과 규모를 확인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옛 관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청송
전국의 옛 관아 터는 도시의 확장과 도로 개설, 각종 개발사업으로 인해 흔적이 사라지거나 원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청송도호부 관아 터는 옛 행정 중심지의 위치와 공간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이 일대는 근현대에 청송군청과 청송읍사무소 등 행정기관의 터로 활용되어 원형을 보존할수 있어 다행으로 여겨진다.
다만 옛 관아의 원형이 어느 정도 보존돼 있는지는 건물의 존치 여부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옛 건물의 흔적과 지형, 담장과 건물터의 위치, 문헌에 기록된 배치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 신민헌과 쌍광헌, 청송의 옛 공간에 담긴 의미
청송도호부의 동헌은 신민헌으로 불렸으며, 쌍광헌이라는 명칭도 전해진다.
동헌은 지방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고 백성을 다스리던 관아의 중심 건물이다. 따라서 신민헌의 명칭과 위치, 건물의 규모를 살펴보는 것은 청송도호부의 행정 공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청송도호부의 입지와 관련해서는 청송읍의 방광산과 소헌왕후의 시조묘가 있는 보광산, 두 산의 이름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광(光)' 자와 관련해 쌍광헌이라는 명칭이 지역의 지리적 인식과 연결돼 해석되기도 한다.
다만 쌍광헌이라는 명칭의 유래와 방광산·보광산의 관계는 관련 문헌의 원문을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옛사람들은 관아의 입지와 주변 산세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명당에 자리한 관아는 지역민에게 자긍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지금의 군청자리가 대단한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 문헌 속 청송도호부를 다시 읽다
한 지역의 역사는 오래된 건물이나 유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옛 기록에 남은 지명과 인물, 행정제도의 변화, 관아의 건립과 중창에 관한 자료가 함께 모일 때 비로소 그 지역의 역사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민중기 씨가 오랜 시간 옛 문헌을 찾아 정리한 《청송도호부문헌고찰》은 청송의 역사를 다시 살펴볼 수 있는 출발점이다. 책에 담긴 기록을 관련 사료와 대조하고 그 의미를 하나씩 풀어가는 작업은 청송도호부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연재는 단순히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청송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 역사적 자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는 데 의미가 있다.
청송도호부는 책 속에만 남아 있는 옛 관청의 이름이 아니다. 그 안에는 지역의 행정과 문화, 인물과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제 옛 문헌의 문을 열고 청송도호부의 역사를 하나씩 되짚어 보려 한다. 잊혀 가던 기록을 다시 읽는 일은 청송의 과거를 밝히는 동시에, 오늘의 청송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